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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카페

진화의 목표는 진보인가 다양성인가?




곰에게 쫓기는 수학자 (또는 철학자)

아이패드에서 읽고 있었는데 어느 때인가 아이패드가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어 버린 후 흐름이 끊겨버렸다. 몇 주 전에 가서는 애들의 교육 상이라는 명목으로 다시 아이패드를 회수했다. 요즘은 식사 시간에 주문을 기다릴 때나 남은 언저러 시간에 틈틈히 보고 있다.


대략 하반부로 가고 있는 시점 같다.

진화의 목적에 대해 의문을 던지면서 저자는 한가지 이야기를 들려 준다.

우리가 곰을 떠올릴 때면 꿀을 좋아하는 느림보로 상상하곤 하지만 내리막이나 평지에서는 인간보다 빠르다고 한다. 어느날 철학자와 친구가 산에서 곰을 만나 도망가기 시작했다.


철학자가 잠시 앉아서 신발 끈을 매자 다급하고 의아해한 친구가 묻는다. 그렇게 신발끈을 단단히 묶고 도망가도 곧 곰에게 따라 잡힐꺼야. 그러자 철학자가 말한다.

"곰보다 빨리 뛸 필요는 없네. 자네보다만 빨리 뛰면 되거든."


보기에 따라 어긋난 우정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저자는 이 이야기가 진화의 방향을 보여 준다고 한다. 즉, 진화는 곰보다 빨리 뛸 정도의 혁신을 위해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옆 개체보다 조금 뛰어나거나 다른 능력을 가지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다양성 부족의 대가인 닭과 돼지

우리는 자주 언론에서 신종 인플루엔자때문에 닭, 돼지 수천, 수만마리가 몰살당하는 소식을 접한다. 이 것은 생물이 다양성을 확보해가려는 경향을 무시한 결과라고 말한다. 즉, 살이 많고 알을 잘 낳는 우량종만 선택하여 그 자식만 번식시키다 보니 수천 수마리의 개체라고 할지라도 유전자의 변화는 거의 없다. 이런 때 이 (거의) 동일 유전자를 가진 개체들에게 취약한 질병이 나타나면 모두 몰살 당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 자연은 생명체들이 여러 유전자를 가지는 방향으로 진화를 이끈다고 말한다. 꼭 더 빨리 뛰거나 높이 날 수 있는 그런 개체가 아니라 운동능력이 떨어지더라도 여러 유전자를 가지는 방향으로 진화는 일어난다고 한다. 닭이나 돼지를 잡아 먹는 맹수가 나타나면 좀 더 높이 날고 빨리 뛰는 개체가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 (또는 그런 촉각이 발달한 개체가 살아남을 수 있고 혹은 운이 좋게 맹수가 접근한 반대편에 있던 녀석이 살아 남을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운동능력이 조금 떨어진다고 해도 질병에 내성이 있는 녀석이 있다면 더 높이 날고 잘뛰는 녀석보다 그 녀석이 살아남을 것이다. 운좋게 운동성도 좋고 질병내성이 좋은 유전자를 가진 녀석이 출현할 가능성도 있지만 유전자 조합의 확률상 그런 개체수는 그렇게 많아보이진 않는다. 이런 이유로 개체가 오래 존속하기 위해서는 여러 성질을 가진 다양한 개체가 있어야 할 것이다.


개체의 종속의 측면에선 개체가 X-Man처럼 초능력을 지닐 정도의 능력자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유전자 조합의 다양한 개체군을 가지는게 바람직하다는게 요지다.

 


진화가 지향하는 것은 진보인가 다양성의 확보인가

하지만 여전히 장기적인 관점에서 진화는 진보를 위해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한다. 저자의 스승도 그런 사람 중의 한명이라고 한다. 이 글에선 둘 중 어느쪽이 맞다고 말하기 보다는 그런 두 의견이 있다는 것을 소개하고 싶을 뿐이다. 


저자는 어느때 '이기적인 유전자'의 저자인 제레미 레프킨을 만난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는  '눈먼 시계공'이라는 책의 저자 유명하다. 어느 집단이 

'모든 복잡한 것은 설계자 있다'

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설계자들을 '지적 설계자'라고 부른단다. 생명체는 물론 복잡함과 아름다움의 예로 눈과 같은 장기를 만든 것은 어떤 설계자가 없고서는 불가능하단 말이다. 


하지만 책에서는 그 훌륭해 보이는 눈도 잘 들여다 보면 꽤 비효율적으로 만들어져 있고 초기부터 어떤 지적설계자가 훌륭하게 계획을 짜서 만든 것이 아니라 선대에서 물려 받은 형태를 어쩔 수 없이 그 환경에서 조금씩 바꿔간 그 정도 수준이라고 말한다. 지적설계자를 주장하는 이들이 그 창조주를 복잡한 시계를 만드는 시계공에 비유했는데 제레미 레프킨은 이를 비꼬아서 그런 시계공이 있다면 눈이 멀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단다. 시계공처럼 아주 복잡한 개체를 디자인하고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더듬더듬 주변의 것들로 조금씩 만들어진 것이 현재의 개체라는 것이다.



결론보다는 과정이

이 글을 쓰다 보니 이전에 다윈의 진화론을 교과서에서 뺀 것에 대해 한참 시끄러웠던 것이 떠올랐다. 필자도 이전에 그에 관련된 글을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는데 요점은

'진화론은 믿음이라기보다 논리적 추론이라는 측면에서 소개될 가치가 충분하다'

라는 거였다. 진화론이 무조건 옳다라기 보다 논리이고 과학적 사고를 훈련시키기 위해 학교에서 가르쳐야한다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지난 글 : 교과서에서의 진화론 삭제에 대해 

:   http://blog.daum.net/whitebrow09?showadmin=9)



진화론이 교과서에 실리는 문제로 약간 옆기로 샜는데 아무튼 진화가 진보를 향해 가느냐 다양성 확보의 방향으로 가느냐도 이미 답을 내놓고 믿음의 문제로 가기 보다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논리적인 토론을 해가야할 것이다. 원래 서양의 evolution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것이 아니라 꽤나 복잡한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동양으로 건너오면서 앞서갈 진(進)을 사용해버려 진보적인 의미로 오인되고 있다는게 저자의 의견이다.


다윈의 진화설을 앞으로 여러 주제를 통해 접할 기회가 많을 텐데 이런 진화의 방향에 대한 두가지 의견이 있다는 것을 알고 바라보면 좀 더 재미나게 들을 수 있지 않을까하여 책을 보던 중에 간단히 메모삼아 남겨본다.


대전도 덥다.


2013년 5월 14일 화요일 저녁